'김연수'에 해당되는 글 4

  1. 2009/01/29 밤은 노래한다 * 김연수
  2. 2008/07/06 꾿빠이 이상 * 김연수
  3. 2008/07/01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 김연수
  4. 2008/06/22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김연수

밤은 노래한다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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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내가 한없는 애정을 듬뿍 주었던 완소드라마가 있었다. 드라마의 완성도와 정성에 비해서는 시청률에서는 지독히도 운이 없었던 드라마. 다시 봐도 여전히 사랑스럽고 달콤하지만 너무너무 슬퍼서 유난히 자주 눈물짓게 했던 드라마. K본부에서 방송됐던 <경성스캔들>이라는 드라마를 기억하시는지. 1930년대 식민지 시대의 경성에서 살았던 시대의 젊은이들이 꿈꿨던 혁명과 연애를 다뤘던 인상적인 드라마였다. 드라마의 마지막 방송에서 기억에 남았던 시청자에게 남기는 끝인사. "먼저 가신 분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소중한 이 땅에서 마음껏 연애하고, 마음껏 행복하십시오." 이 자막을 보고 마음이 참 아렸었다. 불운했던 식민지 시대를 살아갔던 젊은이들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때론 유쾌하게 때론 진중하게 그렸던 센스있는 드라마였는데. 그 드라마에서 청춘은 언제나 봄, 하지만 조국은 아직도 겨울이라고 했던가. 

일제의 가혹한 수탈과 폭압통치 속에서 참 질기게도 신념을 이어나가며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 시절, 일제가 뭉개버리지 못해서 안달이었던 조선의 젊은이들이 품었던 신념은 두가지가 있었다. 국체부정(독립)과 사유재산부정(사회주의), 1920년대 소련 '레닌'의 사회주의 지원정책의 후원 아래 이 땅의 젊은이들은 독립의 한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모색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지금의 꼴수구들이 페인트로 붉은 색깔을 덕지덕지 칠하지 못해 안달인 그 지겨운 색깔논쟁의 연장선에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실제로 근현대사에서 가중 비중있게 다루는 것이 1920년대 '사회주의'와 '신간회'의 활동이다. 1920년대, 만주를 비롯한 국외에서는 독립군들은 '전투'를 벌였고 국내에서는 이렇듯 이념에 대한 갈등과 통합이 모색되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통합의 정점에 서있었던 것이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연대 단체인 '신간회'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통합도 오래가지 못했다. 신간회 내부의 분파간 갈등과 소련의 코민테른의 지시 아래 1930년대 신간회는 와해된다. 

1930년대 시대의 틀을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것이 1931년 터진 만주사변이다. 이때부터 일본은 중국본토를 손에 넣겠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야무지게 식민지를 넓혀갔던 일본이 본격적인 전쟁의 광기에 빠지기 일보직전의 일이다. 간도를 비롯한 만주땅에서는 산발적인 항일연군들의 독립활동이 있었다. 친일파 지주의 집을 습격하거나 인근 평안도지역까지 넘어와 일제의 관공서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들의 주요 활동지였던 간도의 위치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면 오른쪽이 북간도고 왼쪽이 서간도로 나뉜다. (간도라는 영토는 북한과 통일 후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다시 찾아와야 할 여러 이권 중에 하나에 속한다.)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는 1930년대 간도를 배경으로 한, 시대의 모순 속에서 살아간 젊은이들을 다룬 뜨거운 이야기다. 아니 이건 사실 이야기라기 보다는 외침에 가까운 읍소다. 불행했던 식민지 조선이 타국에서 낳은 청년들의 기막힌 삶과 채 피지도 못하고 꺾였던 수많은 젊은 꽃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에 가까운 소설이다. 간도라는 땅이 어떤 땅인가. 민족의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일제의 총칼에 쓰러져 갔던 곳이고 독립군과의 전투에서 지고 돌아온 일본군의 분풀이로 힘없는 조선의 동포들이 잔인하게 학살됐던 슬픈 비명이 깃든 곳이다. 조국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던 그 시절, 변방의 척박한 황무지에 배고픔과 내일을 위한 희망을 품고 이 땅을 떠난 수많은 조선인들의 절박했던 삶의 아픔이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곳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엘리트 교육을 받은 김해연은 간도에서 연인 이정희를 만난 뒤, 그리고 그녀의 비극에 가까운 죽음을 겪으며 자신의 때 묻지 않은 곱디고운 여린 '손'을 저주한다. 처음엔 기계적으로 혁명에 뛰어들지만 그 안에서 이념의 갈등과 식민지 젊은이들의 의미없는 희생과 마주하면서 점점 강인하고 억센 '손'을 갖게 된다. 그토록 저주했던 그 손으로 상대에게 총을 겨누고 스스로가 경계라고 규정했던 살인까지 저지른다. 시대의 비극과 함께 김해연은 성장한다. 그리고 그가 어제까지 살았던 삶과는 전혀 다른 오늘을 살게 된다. 동지의 손에 죽어가는 또다른 동지들의 억울한 죽음을 목도하며 시대의 비극을 체감한다. 조선의 독립이 아닌 중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해야했던 시대가 그들에게 안겨준 모순덩어리의 질곡진 삶. 그리고 그곳에서 쓰러져 간 수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는 소설이다.

불과 1년여 전에 이 나라에서는 참 아이러니한 사건이 일어났다. 조국 티벳의 독립을 호소하던 티벳의 젊은이들이 똑같이 식민지의 아픔을 겪었던 이 나라에서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들뜬 중국 유학생들에게 죽도록 얻어맞은 일이 있었다. 당시 이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던 이땅의 국민들과 경찰들이 있었다. 모순 아닌가? 이 나라처럼 과거로부터 전혀 배우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한때 시대의 약자였던 시절을 망각하고, 타지에서, 국경의 바깥 쪽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쓰러져 간 수많은 젊은이들의 영혼을 간직한 이 나라에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과거 간도 땅에서 독립을 외치다 일제의 총칼에 쓰러져간 그 시절, 그 사람들과 저들이 무엇이 다른가? 타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외롭게 호소했던 저 티벳의 젊은이들이 말이다.

2009년의 대한민국,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곳, 그리고 나의 국적은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 우리가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 사실들은 실은 당연한 게 아니다. 우리는 저 시절 치열하게 살다간, 스스로 자신을 버리고, 자신을 잃어버리고 시대에 몸을 맡긴, 운명 따위는, 개인의 영달 따위는 꿈꾸지 않았던, 나라 없이 태어나 나라 없이 잠들었던 수많은 청춘들의 희생 위에 새겨진 투쟁의 결과이다. 하지만 저 시절 뿌리 깊게 반목된 갈등은 여전히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다. 그 갈등의 연속으로 이 땅은 둘로 갈라졌으며, 나라가 분단된 뒤에는 민주주의와 독재정치가 충돌했다. 수많은 혁명과 민중의 희생 뒤에 민주주의가 간신히 자리잡았다고 하는 지금 이 시대의 우리는 당파 간의 갈등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와의 갈등, 진보와 보수의 갈등, 이 좁은 땅 덩어리 안에서 오늘도 우리는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분노하며 충돌을 반복하고 있다. 아주 단순한 사실 하나를 잊고 살면서. 내가 상대에게 겨눈 그 손가락, 하지만 그 손가락 중 4개가 실은 나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망각하면서. 

그렇다고 해서 마음 속에 꿈을 간직하고 싸웠던 저 시대의 젊음들이 허황된 꿈을 좇았다거나 젊었을 적의 치기를 간직하고 의미없는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혁명가 '체 게바라'는 말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고.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고.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실은 과거 저들이 꿈꾸었던 그 불가능한 '꿈'이었을지 모른다. 저들이 뜨겁게 피우려 했던, 그래서 가장 짙은 어둠의 외로웠던 '밤'을 견디게 해주었던 가슴 속에 품었던 '열망'이었을지 모른다. 저들이 그토록 부르고 싶어했던 '밤의 노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너무 쉽게 그 사실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건 아닌지. 시대의 모순 속에서 조국을 위해 기꺼이 피를 흘렸던, 식민지 시대의 타국에서 아스라하게 져버린 수많은 청춘들이 목숨과 신념, 사랑과 맞바꾼 불가능해 보이지만 언젠가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던 달콤한 '꿈'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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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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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편의 연작 소설로 구성된 <꾿빠이 이상>은 이상(李箱)의 사후에 뜬 '데드마스크'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이 실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밝히는 한 기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실존의 영역을 넘어 신화의 영역으로 들어선 '이상'에 대해서 더이상 진짜냐 가짜냐의 이분법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은 이제 우리의 능력 밖이라고 말하고 있다. 작가 이상이 어떻게서 신화의 영역으로 들어설 수 있었는지 단단한 논리의 과정이 전개된다. 이상의 임종을 곁에서 지켜봤던 이상의 지인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비극적인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 이상과의 추억이 있는 많은 문인들이 납북되거나 월북했고 전쟁통에 목숨을 잃거나 해방 후에 숙청당했다. 엇갈리는 이상의 지인들의 증언들 덕분에 결국 '정황'상의 논리로 가장 근접한 사실을 가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데드마스크'는 얼굴 하얀 아이 김해경이 써야만 했던 '이상'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기자가 예로들었던 파스칼의 확률의 법칙이 말하는 것처럼 유한의 값에 무한의 가치를 곱하면 무한의 기대값이 나온다. 김해경은 자신의 삶을 판돈으로 걸고 불멸의 이상을 완성하려 했다. 기자는 김해경이 작품이 아닌 삶을 도박판에 던졌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두번째 이야기『잃어버린 꽃』에서 이상의 삶을 흉내내고자 했던 서혁민의 수기가 나온다. '김해경'에게서 분리된 '이상'. 그리고 김해경이 어떻게 '이상'을 완성할 수 있었는지 김해경의 삶의 궤적을 좇는다. '내출혈'이라 했다. 김해경 또는 이상은 자기 안에서 둘 중 누군가를 죽여야만 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였고 결국 김해경이 죽고 이상이 남은 것이다.

마지막 이야기 『새』에 등장하는 '피터 주'는 김해경 또는 이상이 느꼈던 정체성의 갈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김해경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김해경은 선택을 했고 스스로 죽음으로써 이상에게 그의 삶을 내어주었다. '데드마스크'는 이상이었으며 그것을 쓰고 김해경은 죽은 것이다. 김해경이 스스로 만든 '이상'은 불멸로 남았으며 신화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 데드마스크니 오감도 제 16호의 존재여부는 더이상 중요한 게 아닌 것이다. 모든 '비밀'을 안고 김해경은 죽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꾿빠이 이상>은 이상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상으로 살았던 '김해경'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었다. 김해경이 완성하고자 했던 '이상'이라는 삶, 그런 '이상'의 삶을 좇았던 서혁민, '이상'을 택한 인간 김해경에 대한 연민.

이 소설은 결코 쉽게 써내려 간 소설이 아니다. 단단한 논리를 앞세워 치밀한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작가는 분명 엄청난 자료조사와 천재작가 '이상'에 대한 연구를 했을 것이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이상의 작품들까지도. 하지만 이 이야기는 결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읽어나갔을 때는 '복선'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책을 쓴 작가 역시 천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최고였다. 이상이 쓴 작품들을 이야기에 적절하게 인용할 수 있었던 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한번만 더 읽고 싶다. 그 후에 이 책과 이별할 것이다. 책은 '꾿빠이'라 말하지만 어쩐지 나는 받아들이기가 싫다. 못들은 척 하고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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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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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역꾸역 삼켜 넘겨보려 했지만 내 머릿 속은 뜸을 들이면서 문을 열어줬다. 눈으로 읽어나간 활자들은 어느새 닫혀 있는 생각의 문 앞에서 갈피를 못 잡고 어쩔줄 몰라하며 헤매고 있었다. 차분히 읽어나가야지 마음 먹길 몇차례. 어느새 페이지는 책의 막장에 이르고 있었다. 띄엄띄엄 읽어나간 활자들은 서슬퍼런 의문이 되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눈 앞에 다다랐다.

역사에 대해, 어둠에 대해, 내 몸에 흉터로 남은 나의 지난날에 대해, 타인에 대해, 진실에 대해 끊임없는 물음이 던져졌다. 준비 안 된 질문들과 마주하며 어찌나 마음이 먹먹해지던지. 평소 생각없이 사는 듯하여 내가 많이 아둔해 보인 시간이었다.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와 『뿌넝숴』는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에 남는 메시지를 남겼다. 문득, 인간은 '어둠'이 있기 때문에 '밝음'을 견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웃어야 하고 억지로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억지로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하는 환한 낯 동안의 피곤했던 꾸밈은 어둠이 돌아오는 시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짐짓 딴청을 부릴 수 있다. 나 자신에게 특별히 솔직해질 수 있는 그 '서늘한 밤'을 우린 기다린다.

무척 인간적이고 솔직한 내용의 이야기들이었다. 특별히 '어둠'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을 보여준 것에 감사하다. 삶은 참 복잡하다. 내 안에 쌓인 모든 걸 겉으로 내어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내 인생, 내 안에서 벌어진 일, 나는 타인이 될 수 없기에 고스란히 나의 몫으로 감당해야만 하는 일들, 내 마음에 아로새겨진 모든 것들을 다른 이에게 보여줄 수 없다. 그중에는 '온전한' 나의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일부는 분명 타인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꺼내놓을 수 없는 나의 '비망록'에 대해 그것의 존재함에 대해 이야기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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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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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도서관 책상 앞에 앉아 이제 막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를 받을 아이는 놀랍게도 바로 자신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애써 외면하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 아이는 조금 전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도망치듯 도서관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른 아침의 도서관은 텅비어 있었다. 창가 쪽의 구석자리에 앉은 아이는 특별한 그날, 그 시간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안 되는 거였다. 도서관에 오기 훨씬 전에 버스가 지나갔던 어느 고등학교 앞에서 그 아이는 내려야 했다. 그날은 그 아이가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삼수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던, '수능날'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내리지 않았다. 내릴 수 없었다. 버스 안에서 얼굴을 파묻고 주변을 외면했다. 지난 2년간의 기억이 쓰라리게, 그러나 너무 고통스러울 정도로 생생하게 스쳐지나갔다.

그 아이가 자신에게 편지를 써야만 했던 이유는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게 끝이 아니라고 얘기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아이는 누군가와 연결돼 있지 않았다. 재수를 결심한 그 아이는 졸업을 하고 나서 의도적으로 자신과 연결돼 있는 관계들을 끊었다. 이기적인 아이는 그래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오만하게 착각했었다. 한동안은 관계에 얽매여 있지 않다는 것에 홀가분함을 느꼈다. 자유로운 거라고 느꼈다. 친구들은 방학 때 만나면 된다고 여겼다. 아이를 잊지 않고 걱정해주는 몇몇 친구들이 있었지만 아이에게는 그렇게 애틋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친구들이었으니까 그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재수를 실패하고, 조금 지난 후 주변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음을 알게 됐다. 점점 느슨해진 관계는 어느 순간 연결이 끊어져 있었다. 그 후, 활발하고 살가왔던 아이는 반항 한번 안 했던 부모에게 독을 품고 말대꾸를 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방황의 시작이었다. 무늬만 삼수생이었던 아이는 가방에 책 한권 달랑 싸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저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시간이 너무 더디게만 느껴졌고 그러면 그럴수록 외로움은 더 깊어져 갔다. 아이는 점점 안에서 병들어 갔다. 썩은 정신을 갖고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척 했다. 그리고 그 해 수능날 아침, 아이는 그 책상에 다시 앉아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는 중이다. 편지를 쓰고 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떠올려 본다. 지쳐서 축 늘어진 어깨, 초라한 뒷모습. 그날 아이는 지난 2년간의 쓸쓸한 시간들에 진심으로 작별을 고하고 싶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는 동안 나는 그 아이를 생각했다. 혼자였지만 혼자라고 인정하지 않았던 아이. 그러면서도 누구에게도 '존재'하고 있다고 외치지 못했던 지독한 외톨이였던 아이. 그 아이를 생각하면서 책을 읽은 나는 이내 마음이 뜨거워졌다.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도 나는 저 아이를 아직 놔주지 못했나보다. 하지만 전보다 많이 담담해졌다. 예전에는 저 아이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조금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다시 감정이입이 돼서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얘기를 이어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느끼게 된다. 내가 기억하는 저 아이는 이제는 추억이 되어 가고 있다. 빛이 조금 바랬음을 실감한다. 내가 지나온 삶의 어느날을 기억해주고 말해줄 누군가와 연결돼 있어야 한다는 '정민'의 말처럼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돼 있어야 한다. 혼자여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이제는 오만한 생각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믿을 수 없는 불행 속에서 외로움을 끌어 안고 살았던 이길용은 누구도 예상 못한 방향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만들어 갔다. 시대의 불행과 개인의 불행이 꼭 맞아 들어갔던 '나'의 할아버지와 정민의 '삼촌, 그리고 이길용의 이야기를 통해 암울했던 시기의 그늘 속에서 '폭력'으로 영혼이 짓밟힌 시대의 희생자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짓이기고 쓰디 쓴 고통을 맛봐도 질긴 생을 이어나가며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행복을 찾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현실이 고통스럽다 여겨질 때 누군가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세상 한구석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가 만든 울타리 안으로 깊게 침잠하려 하지만 그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게 아니다. 희망을 기약하기 힘든 절망 속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빠져나오려 안간힘을 쓰지만 그 과정은 퍽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저런 관계로 맺어진 여러 존재들에 대해 당연하다는 생각은 더이상 하지 않는다. 무엇하나 '저절로' 있는 건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이유가 있다. 타인에 대한 의식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려하기 때문이다.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알려야 한다. 그래야 누군가라도 돌아본다. 알아서 뒤따라 오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는 사람이 있다. 나의 '삶'이 타인을 통해 회고되는 것도 꽤 인상적인 경험이다. 나와의 추억을 얘기해주는 친구들이 그런 것처럼.

그 아이는 오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으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예전에 자신에게 썼던 편지를 다시 꺼내봤다고 한다. 하도 많이 읽어서 꼬깃꼬깃 손때가 묻은 편지에는 치기어린 후회와 격려,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담겨 있었다고. 그리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방안 어딘가에 다시 편지를 숨겼다. 절대로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소중한 편지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정말 힘들고 아팠을 때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쓴 편지가 아닌가. 그때 왜 그랬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저 아이는 대답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잘 알면서 왜 그러냐고 오히려 핀잔을 주더라고.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편지는 쓰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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